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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과 남영동 대공분실의 역할

by 모두바네 2023. 7. 12.

 

출처:나무위키

남영동 민주 인권 기념관은

남영동 5.18 기념관으로도 알려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에 위치한 기념관입니다.

1980년에 일어났던 5.18민주화운동, 일명 광주항쟁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남영동민주인권기념관의 중요한 점들입니다.

대한민국 남서부의 거대 도시인 광주를 통과한 5·18민주화운동.

봉기는 당시 군사적 절대주의에 도전하고 인간의 권리를 증진시키려는 민주 운동이었다.

기념관에는 봉기, 봉기 자체 및 그 여파로 이어지는 사건을 기록하는 전시물을 제공합니다.

전시물에는 사진, 문서, 흔적, 운동에 관련된 개인과 공동체의 투쟁, 제안 및 성과를 묘사하는 시청각 자료가 포함됩니다.

기념관에는 방문객들이 봉기의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헌신적인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성찰과 추모를 위한 엄숙한 공간으로 사용됩니다.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은 국민에게 민주주의, 인간의 권리, 사회정의의 의미를 알리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한때의 투쟁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대중적인 원칙과 인권의 가치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촉진하고자 합니다.

기념관은 지역 커뮤니티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이벤트를 진행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대화를 촉진하고 사회적 결속을 촉진하며 대중적 가치와 인간의 권리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념관은 서울 용산구 남영동에 있습니다.

옛 남영동경찰서와 인접해 있어 광주항쟁 당시 사람들이 억류되어 고문을 당했던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은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에 관심이 있는 방문객을 환영합니다.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운 이들의 용기를 보여주는 증거로 서 있습니다.

그것은 사회에서 이러한 근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기념하는 역할을 합니다.

2005년 경찰청 인권 보호센터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일반에 공개가 되었으며, 2018년 12월 행안부로 이관되면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관리운영 책임을 맡아 2019~2020까지 임시 운영하였다.

2021년부터 리모델링 및 신규 건축 공사를 거쳐 2024년에 정식 개관할 예정입니다.

남영동 대공분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의 경우 피고문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하고 공산주의 사상범으로 조작하기 위해 허구의 조서에 담긴 내용을 모두 시인하게 하기 위해 고문실의 내부 또한 특이하게 개조되었다. 

바닥과 벽면을 모두 붉은 계열의 페인트로 칠하고 수용자의 자살 방지와 고문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나무보드 흡음재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0년 리모델링에 따라 박종철이 고문당한 509호를 빼고 이러한 잔혹한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하여 바닥과 벽면을 연두색 페인트로 칠하고 본래 욕조가 있던 자리에 세면대와 변기를 놓고 바닥에 나사로 고정되는 의자까지 떼어버렸다. 

실제로 남영동 대공분실의 고문실마다 있는 라디에이터를 기울이거나 흡음재의 구멍을 자세히 살펴보면 원래의 빨간 벽면 페인트 자국을 볼 수 있다. 

또한 주 고문실로 사용된 5층에는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도 모르는 기이한 구조의 방이 여럿 있다. 

2019년부터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에서 대공분실을 민주운동기념관으로 변모시키고 폐기되거나 용도변경되어 그 잔혹한 흔적이 감춰진 대공분실의 원형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정보기관, 군 수사기관, 대공분실 외에 특수수사대 분실과 일반 경찰서 및 파출소에서도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군 수사기관의 경우 대통령 암살사건의 주동자급 가해자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 

일반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를 들면 연행된 사람이 여자라면 성고문까지 했었고, 민주화 운동가가 빨갱이로 몰리는 것 말고도 연쇄살인사건이 터졌으면 증거가 없는 엉뚱한 용의자가 살인범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간첩조작 사건이 터질 시 일가 친척까지 불고지죄로 줄줄이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심지어 1983년에 섬유업과 관련된 대기업 이사가 특수수사대 요원들에게 고문을 당하다 죽기도 했으며 박종철을 고문하다 죽인 수사관도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특수수사대 요원에게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